이번 설에 고향 집에 가면서 세뱃돈과 부모님 용돈을 쓸 요량으로 현금을 찾으러 집 근처의 주거래 은행인 A은행 현금 인출기에 들렀네. 출금하려고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비밀번호가 다섯 번 잘못 입력된 상태라 출금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계속 뜨네. 분명히 모바일 앱에서는 모든 거래가 현재 쓰고 있는 비밀번호로 잘 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송금을 해서 딸 카드로 인출해서 겨우 설을 보냈다네.
명절 직후 북새통 은행 창구
설 연휴가 끝나고 A은행에 가서 카드에 뭐가 잘못됐는지 확인하려다가 생각해 보니, 집 바로 앞 상가에 B은행 현금인출기가 있으니 B은행 지점에 들러서 통장 하나 개설하고 현금 인출 카드를 하나 만들면 더 편리하겠다 싶어, B은행 지점에 먼저 들르기로 했네. 은행이 한 3시 반쯤 문을 닫으니, 2시 반쯤 집을 나서서 B은행에 도착했네.
역시 명절 직후라서 그런가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네. 코로나 방역 수칙 때문에 창구 앞 대기실에는 일정 인원만 들어갈 수 있어서, 은행 앞 복도에 의자를 일렬로 깔아 놓아 번호표를 받고 거기서 기다렸네. 내 순서가 돼서 드디어 은행 안으로 들어가니, 밖에서 오들오들 떨 때보다 은행 안은 정말 따뜻하고 의자도 폭신해서 천국이 없네 하고 생각했다네.
갑작스러운 고성 속에 행복한 순간 와장창
그런데 천국의 행복을 누리는 시간도 잠시, 은행 창구 한 곳에서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네. 중년의 남자 손님과 그를 응대하는 여직원 사이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네. 여직원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지만 중년 사내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서 대기실이 떠나갈 듯하였네.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 양반의 높은 목청은 30분 여분 간 동안 계속되었다네.
창구 여직원만으로 문제 해결이 안 되니 청원경찰도 왔다 갔다 하고 이를 지켜보던 상급 자가 나서 수습을 하려 하다 안되니, 업무방해로 경찰을 불렀지만 연행하거나 그러지는 않고 경고 정도만 하고 가니, 그 이후로도 그 양반 목청은 조금 낮아졌지만, 멈추질 않았네.
그 양반의 컴플레인이 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가장 많이 들린 단어는 '원칙'이라는 단어였다네. 어쨌든 소란은 계속되는 가운데 은행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은행에 들어온 손님만 받으려는 의도인지 은행 셔터 문이 내려간 가운데 계속되는 이 소란을 듣고 있자니 스트레스가 나에게도 전파되어 나 자신도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네.
스트레스는 왜 이리 전파가 잘되는가?
꾸역꾸역 내 차례가 되어서 통장 개설하려는데, 예전과는 달리 통장을 만들려면 본인 신분증을 창구에 제출하면 은행 직원이 의료보험공단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공단에서 제공하는 증빙을 받아야 통장을 개설할 수 있다고 하네. 그런데 21세기에 전화로 확인이라 이것도 코미디 같은데, 의보공단 콜센터도 전화연결이 쉽지 않아 한 10분 정도 또 기다렸다네.
어렵게 연결된 전화로 의보공단 콜센터 직원과 내가 직접 통화하며 이것저것 나의 신상정보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네. 그러고 나서 팩스가 은행 창구로 와야 하는데 팩스 오는데 이것도 한 10분 정도 걸렸다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통장을 개설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복잡해진 절차와 이 절차에 따르는 기다림의 시간 동안 나도 열이 꽤나 받았었나 보네. 의도치 않게 은행 창구 직원에게 조금 언짢은 말을 몇 마디 했던 것 같네. 그래서 새로 나온 통장을 건네받으며 은행 창구 직원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고생하신다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젊은 시절 잘못을 반성한다네
그러면서 아주 오래전 정말 젊었을 때 내가 모 은행에서 고성으로 지르면 서, 오늘 그 양반처럼 컴플레인을 했던 일이 생각이 났네. 나도 그때는 한참 젊을 때라 그랬던 것 같긴 한데, 그 시절 나는 IMF 전에 지방에서 작은 평수의 미분양 아파트를 하나 분양받아 대출금을 그럭저럭 갚아나가던 중 IMF가 터져버렸네.
까마득한 기억에 의하면 그 당시 연 금리가 7~8% 정도여서 감당할 수 있었는데, IMF 이후 거의 금리가 20%에 육박했던 것 같네. 그래도 분양권을 포기하지 않고 어렵사리 대출금을 갚아나가다 몇 년 후 은행에 들러 대출금 완납을 하고, 대출 통장을 폐기할 때 그 통장을 기념으로 간직하려는 마음으로 완납한 통장을 돌려달라고 은행 창구 직원에게 말을 했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창구 직원은 내 통장을 이미 찢어 자기 책상 아래 휴지통에 버린 후였다네. 이때 정말 나는 소위 뚜껑이 열렸다네. 그래서 아까 그 양반처럼 고성을 지르면 항의했던 것 같네. 그런데 그때와 지금 상황과 다른 점은 그 당시 그 은행에서는 고성이 나자마자 지점장이 창구로 뛰어나와 나를 지점장실로 데리고 가 차 한잔 주며 양해를 구해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었네.
그래서 오늘 이 은행의 고객응대 매뉴얼을 조금 손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네. 그나저나 오늘 일을 겪으며, 이제 나이도 먹고 세상을 조금은 아는 때가 되어 혹여 그때 속상했을 나를 응대했던 그 직원에게 늦은 용서를 구한다네. 나이 들며 조금은 유순하고, 관대하며, 예의 있고, 품의 있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는 하루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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