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3/27 일요일 오후 9시 40분, 어제 시청률 9.5%
"마침내 용상에 오르며 조선의 세 번째 국왕이 되는 이방원. 그러나 그의 아내 민 씨는 궁궐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서러움을 견디지 못한 민 씨는 이방원의 명을 어기고 입궁을 단행하고, 이방원은 본인의 뜻을 거스르는 민 씨에게 크게 분노하는데..."
이방원과 처가 민 씨 가문의 갈등 (토사구팽의 서막)
지난 21회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사병을 혁파하겠다고 선포했으나 대신들의 거센 반대에 직면하는 이방원. 결국 민 씨 가문의 도움 없이는 뜻을 이루기 힘든 상황에 처하지만 이방원과 민 씨 사이의 갈등의 골은 점차 깊어져만 가는데..."
태종 이방원이 용상에 오르는 선위 교서 발견하다
이번 22회 예고를 보면 이방원이 드디어 용상에 오르자 부인이자 쿠데타의 동지인 민 씨를 궁에 들이자 않자 이를 어기고 민 씨가 궁궐로 무단 입궁한다는 스토리인데 과연 이것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드라마 전개인지 필자의 짧은 역사 지식으로 지금까지 접하지 못한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방원이 즉위한 1400년 12월 7일을 전후해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다가 정종이 태종 이방원에게 용상을 넘기고 본인은 상왕으로 물러나는 선위 교서를 발견하고 이를 인용해 보고자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 접속하면 조선왕조실록 원문 볼 수 있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조선왕조실록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니 1400년 11월 11일(정종 2년)에 '정종이 왕세자 방원에게 선위 하다'라고 나와있다. 서의 교서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정종이 이방원에게 선위 하다
임금이 왕세자(王世子)에게 선위(禪位)하였다.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이무(李茂)는 교서(敎書)를 받들고, 도승지(都承旨) 박석명(朴錫命)은 국보(國寶)를 받들고 인수부(仁壽府)에 나아가서 올리니, 세자가 울면서 받지 않았다. 임금이 세자에게 전지(傳旨)하였다.
선위 교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 달리고 활 잡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는데, 즉위한 이래로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과 변괴가 거듭 이르니, 내가 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나 어찌할 수 없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이치에 통달하고, 크게 공덕이 있으니, 마땅히 나를 대신하도록 하라." 세자가 부득이하여 수선(受禪)하였다. 그 교서(敎書)는 이러하였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조종(祖宗)께서 어질고 후하시므로 덕을 쌓아 큰 명(命)을 성취하고, 우리 ‘신무 태상왕(神武太上王)’이 처음 일어날 때에 미쳐, 왕세자(王世子)가 기선(幾先)에 밝아서 천명(天命)을 명확히 알고,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主唱)하여 큰 기업(基業)을 세웠으니, 우리 조선(朝鮮)의 개국이 세자의 공이 많았다. 그러므로, 당초에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서 물망이 모두 돌아갔는데, 뜻하지 않게도 권간(權姦)이 공을 탐하여 어린 얼자(孽子)를 세워 종사를 기울어뜨리려 하였다. 하늘이 그 충심(衷心)을 달래어 계책을 세워 감정(戡定)해서 종사를 편안히 하였으니, 우리 조선을 재조(再造)한 것도 또한 세자의 공에 힘입은 것이다. 나라는 이때에 이미 세자의 차지가 되었으나, 겸허(謙虛)를 고집하여 태상왕께 아뢰서 착하지 못한 내가 적장자(嫡長子)라 하여 즉위(卽位)하도록 명하게 하였다. 내가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서 면강(勉强)하여 정사에 나간 지 지금 3년이 되었으나, 하늘 뜻이 허락하지 않고, 인심이 믿지 않아서, 황충과 가뭄이 재앙으로 되고, 요얼(妖孽)이 거듭 이르니, 진실로 과인[寡昧]의 부덕한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있다. 하물며 내가 본래 풍질(風疾)이 있어 만기(萬機)에 현란(眩亂)하니, 정신을 수고롭게 하여 정무에 응하면, 미류(彌留)에 이를까 두려웠다. 무거운 짐을 내놓아 덕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볼까 생각하였으니, 거의 위로는 하늘마음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망(輿望)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왕세자는 강명(剛明)한 덕을 품수(稟受)하고 용맹과 지략의 자질이 빼어났다. 인의(仁義)는 타고날 때부터 가졌고, 효제(孝悌)는 지성(至誠)에서 비롯되었다. 학문은 의리에 정(精)하고, 영명한 꾀는 변통(變通)에 합하였다. 진실로 예철(睿哲)하기가 무리에 뛰어나는데, 겸공(謙恭)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일찍이 제세(濟世) 안민(安民)의 도량으로 능히 발란(撥亂) 반정(反正)의 공을 이루었다. 구가(謳歌)가 돌아가는 바요, 종사(宗社)가 의뢰하는 바이니,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이 마땅히 대통(大統)을 이어야 하겠다. 이제 세자에게 명하여 왕위(王位)를 전하여 즉위하게 한다. 나는 장차 물러나 사사 집에 돌아가서 한가롭게 놀고 편안히 봉양받으면서 백세(百歲)를 보전하겠다. 아아! 하늘과 사람의 정(情)은 반드시 덕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종사의 대통(大統)은 마땅히 지친(至親)에게 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부자 형제가 서로 잇는 것이 실로 고금의 통한 의리이다. 아아! 너희 종친(宗親)·기로(耆老)·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모두 내 뜻을 받아서 길이 유신(維新)의 정치를 보전하도록 하라."
원문 출처 : 태백산사고본】 1책 6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85면
○辛未/上禪位于王世子。 判三軍府事李茂奉敎書, 都承旨朴錫命奉國寶, 詣仁壽府上焉, 世子涕泣不受。 上傳旨世子曰: "予自幼好馳馬執弓, 未嘗學問, 卽位以來, 澤不及民, 災變荐至。 予雖兢惕, 末如之何。 世子自幼好學達理, 大有功德, 宜其代予。" 世子不獲已受之。 其敎書曰:
恭惟祖宗, 仁厚積德, 以集景命。 逮我神武太上王之肇興也, 王世子明炳幾先, 灼知天命, 首唱大義, 以建鴻業, 則我朝鮮開國, 惟世子之功是多, 故當初建儲之議, 物望咸歸。 不期權姦貪立幼孼, 將傾宗社, 天誘其衷, 建策戡定, 以安宗社, 則我朝鮮之再造, 亦惟世子之功是賴。 國於爾時, 已爲世子之有, 乃執沖謙, 申啓太上王, 謂予不穀居嫡之長, 俾命以位。 予辭不獲, 黽勉卽政, 于玆三年, 天意未允, 人心未孚, 蝗旱爲災, 妖孼荐至。 良由寡昧非德之致, 慄慄危懼, 俯仰有怍 矧予素纏風疾, 眩於萬機, 勞神應務, 恐致彌留, 思釋重負, 以付有德, 庶可以上答天心, 下慰輿望。 王世子, 稟剛明之德, 挺勇智之資。 仁義秉乎生知, 孝悌本乎至誠。 學問精於義理, 英謀合於變通。 固睿哲之離倫, 乃謙恭之彌謹。 早以濟世安民之量, 克成撥亂反正之功。 謳歌之所歸, 宗社之所賴。 惟賢惟德, 宜承大統, 爰命世子, 傳卽王位。 予將退歸私第, 優游怡養, 以保期頣。 於戲! 天人之情, 必付於有德; 宗社之統, 當傳於至親。 故世及以相承, 實古今之通義。 咨爾宗親耆老大小臣僚! 咸體予懷, 永保惟新之治。
參贊門下權近之製也。 遣左承旨李原, 告太上王以禪位之意, 太上王曰: "爲之不得, 不爲亦不得。 今已禪位, 復何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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