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증조할아버지 기일이어서 시골집에 다녀왔다. 코로나로 작년과 재작년은 온 가족이 모이지 못하고 간이로 제사를 모셨는데 그래도 올해는 형제들이 모여 제사를 지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행이다. 정치 얘기 안 나와서
제사를 지내고 나서 제사 음식으로 온 가족이 늦은 식사를 하였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여 음복을 겸한 식사자리라 화기애애하게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술이 한 순배 돌고 나자, 팔순이 넘으신 아버님께서 이런저런 당부의 말씀을 이어가신다. 다행히 정치 이야기나 종교 얘기는 나오지 않고 잘 집안 행사가 잘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안약 통 작은 글씨가 화근이 되다
그러다가 아버님께서 새로운 주제를 꺼내셨는데, 이때부터 살짝 서로간의 이견이 표출되었다. 사연인즉 아버님께서 앉아계신 근처에 안약 통이 하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버님 시야에 이 안약병이 들어오자, 아버님께서 안약병을 들고 안약병에 쓰여있는 사용설명서 글씨가 너무 작아서 읽을 수가 없다고 불평을 하신다. 안약병에 쓰인 글씨가 너무 작아서 50을 넘긴 필자의 눈으로도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글씨가 너무 작다고 흔쾌히 동의를 해 들렸는데, 아버님은 여기서 조금 더나 가시어 정부의 노인을 위한 의약품 관리정책 비판까지 바로 진입하셨다.
허망한 논쟁에 참전하다
음복으로 취기가 살짝 오른 필자는 내심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하였으나, 형님이 가세한 형국을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필자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이런 정치성 화제를 가지고 이견을 표출할 때면 정말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음복으로 모두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는 더더욱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필자도 이 허망한 논쟁에 발을 들여놓았다. 필자가 설파한 개똥 논조는 이렇다. 안약이나 기타 모든 의약품에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있는 사용법이나 함량 표시는 일단 약의 용기는 작은데 거기에 적어야 할 의무 표기사항이 너무 많아서 그렇기 때문에, 의약품 제조자만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었 보인다는 점과 의약품과 동봉된 의약품 설명서도 아마도 법적으로 의무사항이라서 어쩔 수 없이 동봉한 것일 것이니, 의약품 관련 과잉입법으로 인해 의약품 제조사들의 고충도 클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생활에서 약의 사용법을 일일이 읽어가면서 약을 복용하는 일은 흔하지 않고 약을 처방받아서 약사에게 설명받은 대로 사용함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만만치 않은 반론
그러나 아버님과 형님의 반론도 만만치 않으셨다. 글씨를 쓰는 이유는 사람이 읽으라고 쓰는 것인데 읽지도 못하는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어놓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씀 하셨다. 맞는 말씀이다. 하지만 필자도 밥 벌어 먹고사는 직장인이라 이런 현실과 입법취지가 부딪치는 일을 많이 겪어서, 이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귀한 시간 내서 가족 간에 논쟁하는 자체가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서로 다른 주장의 설파 과정에서 언성이 조금 높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족인지란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었다.
용서는 빨리 구해야 한다
그렇게 제사는 마무리되고 다음날 생각하니, 지난밤 필자가 취중에 했던 말들이 후회되었다. 사과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래서 아버님 형님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드리고 용서를 구했다. 가족 간이니 무슨 용서를 구하냐고 말씀하시며 그래도 자네는 말 수를 조금 줄이는 게 좋겠다는 당부의 말씀을 하신다. 이래서 또 세상사는 이치를 하나 더 깨우치게 되는 50대 남자다.
농약이나 의약품 주의사항 큰 글씨 표기가 정답이긴 한데, 어쩌나
며칠 후 갑자기 아버님이 말씀하신 약병에 쓰인 작은 글씨가 생각났다. 그래서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생각해보니, 이런 일로 청와대 민원을 올리는 따위의 일은 그렇고, 다른 현실적인 방법이 없나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아버님께 돋보기 기능이 있는 확대경을 하나 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팡에 들어가서 돋보기를 검색하니 책상에 올려놓고 사용할 수 있는 직경이 15cm 정도의 확대경이 있었다. 확대경 내부에 LED 조명 기능도 들어있어서 조명을 켜고 확대경 아래에 작은 글씨를 시원하게 볼 수 있는 제품이었다. 가격은 2만 원대로 당일 배송도 가능했다. 얼른 배송처는 아버님 댁으로 결재를 했다. 다음날 배송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뜨길래, 아버님에게 전화드려 확대경을 잘 사용해보시라는 말씀과 함께 다시 한번 용서를 구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시골 노인분들이 많이 사용하는 농약이나 의약품의 사용법이나 주의사항은 정말로 큰 글씨로 쓰던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도 분명 노인이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아버님의 심정도 이해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필자도 아들놈에게 이와 유사한 노인 말씀을 하소연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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